지난 시간에는 라이프니츠가 주장한 세계의 최소 단위, ‘모나드’를 통해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라이프니츠에게 존재란 신이 예정한 조화 속에 있는 실체였습니다. 오늘은 철학자들의 존재론 분석 시리즈 24번째 시간입니다. 칸트의 12범주와 존재론을 재해석 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18세기, 견고했었던 합리주의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철학의 지평을 완전히 뒤바꾼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임마누엘 칸트 입니다. 그는 “우리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있는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며, 기존의 존재론을 폐기하고 새로운 ‘범주론’을 그 자리에 앉혔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칸트가 왜 기존의 존재론을 거부했는지, 그리고 그가 제시한 12범주가 어떻게 새로운 시대의 존재론으로 재해석될 수 있는지 깊이 있게 분석해보겠습니다.
1. 서론: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다
1.1. 전통적 형이상학의 위기
칸트 이전의 철학(특히 라이프니츠와 볼프의 합리주의)은 인간의 이성만으로 신, 영혼, 우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를 ‘독단론(Dogmatism)’이라고 합니다. 반면, 데이비드 흄과 같은 경험주의자들은 “경험하지 않은 것은 알 수 없다”며 인과법칙조차 습관에 불과하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를 ‘회의론(Skepticism)’이라고 합니다.
1.2. 코페르니쿠스적 전회(Copernican Revolution)
칸트는 이 두 갈래 길 사이에서 철학적 위기를 느꼈습니다. 그는 “흄의 책을 읽고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고백하며, 철학의 방향을 180도 바꿉니다. 지금까지 철학이 “우리의 인식이 대상(사물)을 어떻게 따르는가?”를 고민했다면, 칸트는 “대상(사물)이 우리의 인식 구조를 따르는 것이 아닐까?”라고 발상을 전환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철학사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입니다. 이 전환이 바로 칸트 존재론의 핵심 열쇠입니다.
2. 칸트 존재론의 핵심: 선험적 분석론
2.1. 존재론(Ontology)에서 분석론(Analytic)으로
전통적인 존재론은 “무엇이 존재하는가?”를 묻습니다. 하지만 칸트는 이 질문이 틀렸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물자체(Thing-in-itself)’, 즉 사물의 진짜 본모습은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눈과 머리라는 필터를 거쳐 나타난 ‘현상(Phenomena)’ 뿐입니다.
따라서 칸트에게 존재론은 더 이상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대신 “우리가 사물을 경험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학문이 됩니다. 칸트는 자신의 주저 《순수이성비판》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존재론이라는 자랑스러운 이름은… 단순한 선험적 분석론이라는 겸손한 이름으로 바뀌어야 한다.”
2.2. 선험적(Transcendental)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선험적’이라는 단어는 칸트 철학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이는 ‘경험보다 앞선다(시간상)’는 뜻이 아니라, **”경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으로 먼저 갖춰져야 할 조건”**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붕어빵을 먹으려면(경험하려면), 붕어빵 틀(선험적 형식)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칸트의 존재론은 바로 이 ‘붕어빵 틀’을 분석하는 작업입니다.
3. 인식의 틀: 순수오성개념 (12범주)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외부 정보를 받아들이는 ‘감성(Sensibility)’이고, 다른 하나는 들어온 정보를 정리하고 판단하는 ‘오성(Understanding)’입니다. 감성이 재료(직관)를 가져오면, 오성은 요리(개념화)를 합니다. 이때 오성이 사용하는 12가지의 요리 도구가 바로 ’12범주’입니다.
3.1. 12범주의 도출 근거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이 체계 없이 나열되었다고 비판하며, 인간이 내리는 ‘판단(Judgment)’의 형식에서 완벽하게 12가지 범주를 도출해 냅니다.
3.2. 12범주의 상세 구조
이 범주들은 크게 4가지 그룹으로 나뉩니다.
A. 분량 (Quantity)
우리는 어떤 대상을 볼 때, 그것이 하나인지 여럿인지를 가장 먼저 파악합니다.
단일성 (Unity): 하나로 보는 것.
다수성 (Plurality): 여럿으로 보는 것.
전체성 (Totality): 전체를 묶어서 보는 것.
B. 성질 (Quality)
대상의 실재 여부와 상태를 파악합니다. 4. 실재성 (Reality): 무엇인가가 ‘있다’고 판단함. 5. 부정성 (Negation): 무엇인가가 ‘아니다’라고 판단함. 6. 제한성 (Limitation): 어느 정도까지만 그러하다고 한계를 지음.
C. 관계 (Relation) – 가장 중요
대상들 사이의 연결 고리를 파악합니다. 과학과 인과율을 설명하는 핵심 범주입니다. 7. 실체와 속성 (Substance and Accident): 변하지 않는 주체와 변하는 성질. 8. 원인과 결과 (Causality and Dependence):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인과율. (흄의 회의론을 극복한 지점) 9. 상호작용 (Community): 너와 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음.
D. 양상 (Modality)
대상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의 정도를 파악합니다. 10. 가능성/불가능성 (Possibility/Impossibility): 일어날 수 있는가? 11. 현존성/부재성 (Existence/Non-existence): 지금 실제로 있는가? 12. 필연성/우연성 (Necessity/Contingency): 반드시 있어야 하는가?
4. 범주론을 통한 존재론의 재해석
이제 칸트가 왜 이 12범주를 통해 존재론을 재해석했다고 말하는지, 그 심층적인 의미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4.1. 객관성의 근거는 주관에 있다
과거에는 “사과가 빨갛고 둥글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객관적 실재론입니다. 하지만 칸트의 12범주에 따르면, “인간의 오성이 단일성, 실재성, 실체성이라는 범주를 가지고 대상을 종합하기 때문에 사과는 사과로서 존재한다”가 됩니다. 놀랍게도, 객관성(Objectivity)은 사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 형식(범주)의 보편 타당성에서 나옵니다. 모든 인간이 12범주라는 똑같은 안경을 쓰고 있기에, 우리는 세상을 공통된 객관적 세계로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4.2. 자연법칙의 입법자로서의 인간
칸트는 “오성은 자연에게서 법칙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게 법칙을 부여한다”고 말했습니다. 인과율(원인과 결과)이 자연 세계에 원래부터 존재하는 법칙일까요? 칸트는 아니라고 봅니다. ‘인과성’이라는 범주는 인간 오성의 틀입니다. 우리가 이 틀을 통해 자연을 바라보기에, 자연은 질서 정연한 인과 법칙을 따르는 것처럼 나타납니다. 즉, 인간은 자연의 입법자가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존재론의 가장 거대한 재해석입니다.
4.3. 물자체(Noumena)의 한계와 겸손
칸트의 12범주는 오직 경험 가능한 세계, 즉 ‘현상’에만 적용됩니다. 신, 영혼, 자유, 우주의 시작과 같은 초월적인 것들은 12범주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이를 억지로 범주에 끼워 맞추려 할 때 이성은 모순에 빠집니다(이율배반). 칸트는 이 지점에서 선을 긋습니다. “우리는 현상계의 존재 방식은 완벽하게 알 수 있지만, 그 너머의 물자체는 알 수 없다.” 이것은 인간 이성의 위대함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겸손한 존재론입니다.
5. 결론: 현대 철학에 남긴 유산
칸트의 “12범주와 존재론의 재해석”은 단순히 과거의 철학 이론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구조를 밝혀낸 작업입니다.
존재의 중심 이동: 신이나 외부 세계가 아닌, 인식하는 주체(인간)를 철학의 중심에 세웠습니다.
과학의 정당성 확보: 흄의 회의론에 맞서, 과학적 지식(인과율 등)이 어떻게 보편타당할 수 있는지를 12범주를 통해 증명했습니다.
관념론의 문을 열다: 칸트가 주장한 “주체가 대상을 구성한다”는 아이디어는 이후 피히테, 셸링,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관념론의 찬란한 불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칸트가 만들어준 ‘범주’라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봅니다. 칸트의 존재론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깥세상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인식 구조를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다음 시리즈에서는 칸트가 남겨둔 ‘물자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헤겔의 절대정신과 변증법적 존재론에 대해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철학자들의 존재론 분석 시리즈23편 : 라이프니츠 존재론과 모나드 개념